냉전 아시아 갈등과 이주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막아 자국의 안보를 지키고 전략적 이익을 보호하며 민주주의 가치를 증진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목표는 미국의 외교 정책을 형성했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게 하여 문화적 차이와 지리적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라오스에 유사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은 일본, 중국, 소련과 가까워 냉전 중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을 때,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하며 개입했습니다. 한국전쟁(1950-1953)은 20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결과를 초래했으며, 미국의 폭격 작전으로 인해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역에서 투하된 폭탄보다 더 많은 폭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쟁 후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나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1965년부터 1980년대까지 약 70만 명의 한국인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내가 미국에 오게 된 건 어릴 때부터 가졌던 한국에 대한 억울했던 기억들,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이야.”
한국과 마찬가지로 라오스도 베트남 전쟁(1955-1975) 동안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라오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중국,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며,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비밀 전쟁”의 일환으로 미국은 라오스를 비밀 군사 작전에 이용하고 2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하여 라오스는 인구 대비 역사상 가장 많은 폭격을 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과 라오스 내전(1959-1975) 후, 공산주의 단체인 파테트 라오가 결국 정권을 장악하면서 사회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확산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라오스를 떠났고, 1980년대 후반까지 12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재정착했습니다.
“내 집, 내 농장, 우리 소… 우리가 가졌던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 했어요. 준비하지 말고, 팔지도 말라고 했어요.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어요. 정말 모든 걸 내버려 두고 와야만 했죠.”
미국 이민 정책이 아시아계 미국인 성장에 미친 영향
1965년 이민 및 국적법은 국가별 출신 할당제를 폐지해 유럽 외 지역에서의 이주를 더 많이 허용했고, 이로 인해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자 수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후 1975년 인도차이나 이민 및 난민 지원법과 1980년 난민법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난민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는 길을 열었습니다.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아시아계 미국인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주요 인종 또는 민족 그룹입니다. 이들은 20개 이상의 국가에서 뿌리를 두고 있으며, 종종 단일하고 통일된 정체성으로 인식되지만, 그 안에 풍부한 다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에는 약 200만 명의 한인 미국인(한국 인구의 3.8%)과 30만 명의 라오스계 미국인(라오스 인구의 4.3%)이 거주하고 있으며, 두 커뮤니티 모두 캘리포니아에 가장 많은 수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연대기: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1950-1953: 한국전쟁
-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남한을 침공한다. 미국과 유엔이 남한 측에 참전한다. 약 200만 명의 한국 민간인이 사망한다. 미국의 폭격은 베트남 전쟁 이전까지 전례 없는 규모였다. 전쟁은 정전 협정과 함께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되며 종료된다.
1953년: 라오스 독립
-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시사방봉 왕을 군주로 하는 입헌 군주국이 되었다.
1953-1960: 전후 한국의 재건
-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하에, 한국은 전후 복구,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55년: 베트남 전쟁 발발
- 라오스는 베트남 전쟁(1955-1975)의 전략적 전쟁터가 된다.
1959-1975년: 라오스 내전
- 왕당파(미국의 지원), 공산주의 파텔라오(북베트남, 중국, 소련, 북한의 지원), 그리고 중립파(콩레 대위가 이끈 중립파)가 라오스의 통제를 위해 싸운다.
1964-1973년: 비밀 전쟁
- 라오스는 미국의 비밀 폭격 작전, 즉 ‘비밀 전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폭격을 많이 받은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미폭발 폭탄이 남아 있어 개발이나 농업이 위험하며, 민간인 사망과 부상이 계속되고 있다.
1965년: 1965년 이민 및 국적법 (하트-셀러 법)
- 1920년대 이후 아시아계 이민을 엄격하게 제한했던 국가별 할당제를 폐지했다. 이 법은 한국과 이후 라오스를 포함한 아시아계 이민을 크게 증가시켰다.
1960년대-1970년대: 민권운동
-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받아 차별에 맞서 싸우고 평등과 인정을 요구했다.
- 1968년: 유지 이치오카와 엠마 지가 ‘오리엔탈’이라는 모욕적인 용어를 거부하고 ‘아시아계 미국인(Asian American)’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70년대 한국
- 박정희 대통령 하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억압으로 인해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더 나은 기회를 찾게 되었다.
1975년: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 베트남 전쟁(4월)과 라오스 내전(12월)의 종식으로 라오 왕국 정부가 붕괴되고 공산주의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이로 인해 박해를 피해 대규모 탈출이 발생했다.
1975년: 인도차이나 이민 및 난민 지원법
- 수천 명의 라오스인들이 미국에 재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80년: 1980년 난민법
- 미국의 난민 수용 절차를 표준화하고, 라오스 및 다른 동남아시아 난민들의 지속적인 재정착을 지원했다.
1980년대 한국
- 한국은 급속한 경제 성장과 산업화를 경험하면서도 정치적 불안이 심화되었고, 이는 대규모 시위로 이어져 민주 개혁과 군사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 미국으로의 이민은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한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같은 도시에서 중요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1980년대 라오스
- 라오스는 베트남과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친따나칸 마이(신사고 정책)을 통해 제한된 경제 개혁을 도입해 시장 지향 경제로 전환하려 했다.
-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대규모 탈출이 계속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같은 나라로 난민으로 재정착했다. 미국 내 주요 정착 지역은 캘리포니아, 미네소타, 워싱턴, 로드아일랜드였다.
1982년 6월 19일: 빈센트 친 사건
- 중국계 미국인 빈센트 친이 디트로이트에서 두 명의 백인 남성에게 일본인으로 오인받아 폭행당해 사망했다. 이들의 가벼운 형량은 전국적인 아시아계 미국인 민권운동을 촉발했다.
1987년: 공식화된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
- 라오스 난민의 체계적인 재정착을 강화하고, 라오스계 미국인 공동체를 더욱 견고히 했다.